조언이란 가면을 쓴 꼰대질
“작가하고 싶다면서, 회사만 다니고 글은 안 써?”
어느 날 꽤 친하게 지냈던 언니에게서 들은 말은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이후에도 언니는 만남이 끝날 때까지 나를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말투로 조언인지 아닌지 모를 말들을 했다. ‘회사 끝나고 한 두 시간씩 글 쓰면 1년이면 책 한 권 쓰겠다.’ ‘공모전 내봐, 네 나이에 못할 게 뭐 있니?’, ‘내가 네 나이부터 글 썼으면 지금쯤 작가는 되고도 남았겠다.’ 등의 말들.
나와 15살 차이가 났던 언니는 당시 모 대기업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딛고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네 자매 중 둘째였던 언니는,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찍 철이 들어 대학을 포기하고 고졸로 대기업 과장까지 승진한 사람이었다. 또래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일 중독자라고 보일만큼 열정적으로 일했고 승진과 함께 어려웠던 집안도 일으켰다. 언니를 보면 자연히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이룬 것에 대한 자부심이 큰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언니처럼 성공해야지.’란 생각을 많이 했다. 실제로 존경하는 언니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조언도 구했다. 그랬기에 항상 정답이라고 여겼는지, 아니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언니의 조언들에는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 언니의 말들은 소위 ‘꼰대질’과 다름없었고 그 말들에 상처를 받았다고, 기분이 나빴다는 것도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기성세대나 선생을 뜻하는 은어인 ‘꼰대’라는 단어는 언론에서 다뤄지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뉴스타파 김진혁 PD가 2015년에 제작한 5분 시사 영상 <선배와 꼰대>에서 보면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남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 이런 걸 속된 말로 ‘꼰대질’이라고 한다.”
그의 말에 비춰보면 언니는 내게 ‘자기 경험에서 판단한 조언(이라 쓰고 꼰대질이라 말하는)’을 했던 것이다. 언니의 시대와 지금 시대는 같지 않고, 언니의 삶과 내 삶이 같지 않다. 그 때의 언니는 내가 ‘왜 적성에 안 맞아도 회사를 퇴사할 수 없는지.’, ‘출퇴근에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고, 글은 왜 못 쓰는지’에 대한 상황도 모를뿐더러, 나의 환경에 대한 이해 없이, ‘작가가 된다면서 글은 안 쓰는’ 결과에 대한 비판만 한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겐 꼰대였다
‘꼰대’라는 말이 화두가 되면서 나 역시도 꼰대라는 단어가 무서웠다. 조금 늦은 졸업으로 직장에서 나는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자연스레 동기들에게 꼰대라는 말을 들을까 늘 조심했다. 동생들에게 엄격해지려는 순간이 오면 그러지 않으려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노력 여하에 관계없이 모르는 사이에 나도 누군가에겐 꼰대질을 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을 하자마자 입사한 회사에서 막내는 나 혼자로, 잡일은 당연히 내 몫이었다. 업무는 배우면 됐지만 기본적인 소일은 달랐다. 그건 배우지 않아도, 시키지 않아도 해야 되는 일이었다. 사무실 전화는 신호음이 2번을 채 울리기 전에 받았고, 손님이 오면 인사하고 자리를 안내해 드렸다. 이어 “차 한 잔 드릴까요?”를 묻는 일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설거지 거리를 치우는 것도 나였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한 명씩 내 밑으로 사람이 들어와도 그런 소일거리는 내가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만이 없었지만, 어느 순간 나는 ‘왜 내 후임들은 이런 일을 알아서 하지 않을까?’ ‘꼭 시켜야만 하나?’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게는 당연한 일들이 그들에겐 신경 밖의 일이라는 것에 의아한 동시에 화도 났다.
“왜 꼭 제가 시켜야만 하나요? 저는 여기 막내 때부터 알아서 해왔어요.” 결국 참다못한 나는 당시 막내 사원에게 한 마디 했고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일을 처리했지만 어쩐지 내 맘은 편치 않았다. 이후에도 내가 몇 번의 ‘지시’를 해야 잡일이 처리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었고 나는 곧 나와 후임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곧 이전에 내가 겪었던 꼰대질, 그 언니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지금 나는 그 때의 언니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던 거였다. ‘내가 막내 때 이렇게 했으니 이제 막내인 당신들이 이렇게 해야 한다’, ‘난 이게 당연했는데 너는 왜 그렇게 안 해?’ 라는, 내가 그렇게도 경계하던 꼰대질이었다.
사실 그런 소일은 무조건 막내가 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고칠 필요가 있는,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문화일 수 있는데 나 또한 그 문화를 아무렇지 않게 답습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들에게 강요할 권리까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나 역시,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잠재된 꼰대와 마주했다.
꼰대란 벽을 넘어서
누구나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누군가에게 조언과 충고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한다. ‘나도 이렇게 했어, 근데 너넨 왜 안 그래?’나 ‘너희는 우리 때보다 쉬운 거야.’ 라는 말을 한두 살 차이에서도 서슴없이 한다. 고3에게 대학생이, 이등병에게 제대한 선배가, 대학생에게 직장인이 하는 조언에서도 그 말들은 가볍고도 당연하게 흘러나온다. 한두 살 차이에서도 이러할진대,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세대가 다른 사이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진혁PD는 꼰대들의 오류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선배 세대들의 20대엔 적지 않은 기회와, 누군가 부당함에 맞서면 함께하는 연대 의식, 비교적 낮은 대학 등록금으로 인한 자유로운 생각과 경험이 가능했다는 내용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가 지적한 것처럼 윗세대에는 있는데 지금 세대에는 없는 것들이 있다. 그들의 조언에는 지금 세대들에 없는 것에 대한 ‘이해’가 없다. ‘내가 이렇게 해서 성공했는데, 넌 왜 못해?’라는 본인 상황에서의 기준과 ‘너를 위해서 이렇게 하라고 하는 거야.’ 라는 무조건적인 방향성 제시만 있다. 그것은 세상에 상처 받은 세대들에게 또 한 번 생채기를 내는 칼날일 뿐이다.
나는 그런 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막는 하나의 원인이라고 느낀다. ‘꼰대’라는 말 안에는 결국 ‘소통이 안 된다’는 얘기도 숨어 있다. 상대를 위한 조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상대가 나처럼, 내 생각대로 하길 바라는, ‘나 편하자고 하는 조언’일 수 있다.
진정한 소통이 없어지는 시대를 체감하는 많은 사람들이 ‘소통’의 중요성을 말한다. ‘꼰대’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는 것도 시대가 만들어낸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하루아침에도 제도나 시스템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은, 다른 방식의 소통을 해야 한다. 나 때는 어땠느니 하는 말들은 무의미하다.
모두가 자기만의 방식과 기준이 있기에 꼰대의 맹아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속의 ‘꼰대’가 관계를 막는 벽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의 판단과 조언이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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