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권의 바꿈 청년네트워크 시리즈 총서인
룰 디스 시리즈 신간을 소개합니다.
책은 다음과 같이 세 권입니다.
페미니즘 쉼표, 이분법 앞에서
나는 분단국의 페미니스트입니다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페미니즘 쉼표, 이분법 앞에서 청년이 짜는 판 룰디스
정경직 , 최성용, 이아름, 정연, 바꿈청년네트워크 (기획) 지음 | 들녘 | 2019년 03월 29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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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들이 모두 ‘완결된 페미니스트’인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완성된 페미니스트일 수는 없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는 것은 성차별적인 이 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따라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채로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자신을 완결 지음으로써 어떤 정박점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은 죽음의 충동이다. 더 이상 사유하지 않겠다는 의지, 더는 변화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스스로를 멈추게 만든다. _15쪽
속도의 페미니즘은 빠른 확산, 신속한 대응, 가벼운 행위를 가능케 하는 특징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한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빠른 속도는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메르스 갤러리, 메갈리아, 워마드, 다음 카페,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온라인상에 형성된 사이버 매트릭스는 페미니즘에 빠른 속도를 부여했지만, 그와 동시에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논의해왔던 폭넓고 입체적인 논의 내용들은 다소 평면화되는 문제를 낳았다. _22쪽
속도를 고려하는 정치학은 어떤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버리는 정치학이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요소에 대한 고려와 타협, 설득과 협상이 필요한 정치학이다. 페미니즘의 통찰은 누구도 완벽한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우리는 부족하고, 부분적이고, 취약하고, 상호의존적이며, 정동적인(감정적인) 존재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부분성과 부족함, 불완전성과 취약성을 사유하는 것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더 나은 정치의 가능성이다. _48쪽
페미니즘적 인식론은 나아가 피해의 고통과 그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만들어낸 구조적 원인을 제시하는 것을 통해, 기존에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던 이들까지도 포괄하는 연대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확장된 연대는 이 사회가 페미니즘을 상식적 규범이자 공용어로서 수용하게 하는 바탕이 될 것이다. _72쪽
상대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개인의 협소한 자아를 넘어서는 활동이다. 한 개인의 경험 세계는 그 자체로 풍부한 광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한적이다. 개인의 경험 세계를 넘어서고 자신의 경험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경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는 곧 자신이 겪지 않은 또 다른 폭력의 경험을 직면하고 이해하며 그것을 토대로 공감과 연대를 이뤄내는 과정이 된다. _73쪽
나는 적대적 진영 논리와 대비되는 새로운 공용어가 인간에 대한 품위와 존중의 언어여아 한다고 믿는다. 사람을 적군과 아군으로 구분하여 ‘우리 편’은 그 어떤 잘못도 용납될 수 있으나 ‘적’은 반드시 말살되어야 한다는 식의 사고는 차별과 혐오의 사고로 이어지기 쉽다. 이에 맞서는 대안적 언어라면, 그 어떤 인간도 있는 그대로 존중되어야 하며, 사람들이 가진 인간적 품위가 손상되어선 안 된다는 가치를 내포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_89쪽
이렇듯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늘 당연하게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전제를 다시 한 번 뒤흔들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주장한다. 젠더 억압을 당사자성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왜곡이라고. 이 글에서는 안정된 재현 주체를 상정하는 당사자성과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고 배타적인 실천을 넘어선 정치적·윤리적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_100쪽
이제 누가 젠더 억압의 당사자인가를 논하는 것은 과연 소모적이다. 우리가 소수자에 대한 억압을 비판하고 사회적 공론화를 요구할 수 있는 이유는 분리할 수 없는 수많은 정체성들이 가로지르는 어지러운 시공간 속에 배치되는 바로 그 지점에 개인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인권의 연결성과 다양성을 사유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면 트랜스젠더 해방도 여성해방도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다. _101쪽
‘여성’이라는 용어는 늘 가변적이고 모순적으로 성립되며, 누군가를 규정하는 완전한 의미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대상을 재현하고자 할 때, “어떤 여성을 재현할 것인가?”라는 불안한 경합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에 따르는 배타적인 실천은 결국 ‘동일성의 폭력’이라는 또 다른 폭력에 가담하면서 더 심한 파편화를 불러일으킨다. _115쪽
정박된 ‘나’를 말하기를 포기하고, 어떤 ‘나’도 자신에게 속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무책임하지 않을 것이며,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다. 당사자성, 정체성을 벗어난 연대의 정치적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 _120쪽
독립한 후 내 자취방은 종종 번갈아가며 가출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도피처가 되었다. 가족을 ‘중재’하는 내 역할은 사실 그들을 내 방에 머무르게 했다가 다시 돌려보내는 것뿐이었다. 이제 나는 그들이 중재라 부르는 이 역할을 자처할수록 폭력을 끝내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_129쪽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고통의 근원을 사유하며 피해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말은 피해자의 고통에 침묵으로 일관한 채 그저 피해자의 몸만을 편안하게 해주는 행위와는 다르다. _145쪽
피해자가 겪는 고통 사이에서 심사숙고함으로써, 그가 자책이나 불안 속으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는 사유와 말. 또한 이는 피해와 가해의 경험을 구조 속에서 사유하게 만드는 말일 것이다. 그 말들은 연속적이고 복잡한 질문들과 함께 무엇이 문제인지 바로 가려내고, 젠더폭력의 문제점을 올바르게 정치화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폭력의 피해에 굴하지 않고 연대하고자 한다면 이 사유의 여정에서 마주치는 질문들과 직면하는 것이 필요하다. _151쪽
나는 분단국의 페미니스트입니다. (룰디스)
청년이 짜는 판 룰디스
수지 , 추재훈, 영민 지음 | 들녘 | 2019년 03월 29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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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그것을 마주하고 더 잘 보듬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 발견한 것이 페미니즘이었다.”
페미니즘이라는 테마로 분단 현실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시도
“분단이라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발견한 나의 구원자, 페미니즘”
"식민지, 냉전, 전쟁의 풍파를 거치며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도구로 전락했다. 정전 후에도 국가는 계속해서 군인을 필요로 했고, 이에 따른 군사주의적 남성성에 대한 강조는 필연적으로 여성성의 평가 절하를 수반했다. (중략)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의 여성들은 가부장적 질서와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순응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받게 되고, 당면한 거시적 과업 속에서 젠더 문제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될 것이다."
전쟁을 직접 겪은 이와 아닌 이. 전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전방과 후방. 지키는 자와 보호받는 자. 남자와 여자. 전쟁은 이처럼 남녀라는 젠더 간 이분법적 차이가 극대화되는 시기다. 분단에 따른 군사주의는 남자들을 사회·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도록 했을 뿐 아니라, 여성혐오적 정서를 재생산하는 기반이 되었다.
섹슈얼리티는 국가 폭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전시 강간, 군에 의한 위안소 운영, 기지촌 클럽 등 국가가 용인하는 성산업 카르텔 등은 모두 국가 폭력과 헤게모니적 남성성, 그리고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가 각각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20세기 동아시아에서 국가 폭력은 냉전과 결부되면서 복잡하고도 교묘한 형태로 펼쳐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냉전은 ‘열전’의 형태로 나타났고, 국가 폭력으로 인한 피해는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동아시아 냉전하에서 각국이 경험한 국가 폭력은 본질적으로 모두 연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전쟁과 폭력이라는 극단적 상황은 남성에게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지배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한국 남성들 사이의 유대감은 성별 권력을 이용해 여성들을 마음대로 착취할 수 있는 남성성을 서로 재확인하고 공유하는 형태로 형성되었다. 아직까지 비정상적 정전 체제에 놓여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구조는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인 동시에, 냉전의 직격타를 피해갈 수 없었던 동아시아 신생국이자 제국주의로부터 갓 독립한 탈식민 국가였다. 북한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냉전하에서 분단과 전쟁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이 과정에서 남녀평등론 또한 국가와 민족의 존립을 위한 젠더 정치로 변질되었다. 체제 경쟁과 군사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남녀평등이 대남선전용 레토릭으로 활용되는 동안, 실제 여성 문제 해결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처럼 전후 분단 체제하에서 남과 북의 젠더 구조는 서로 공명했다. 남한의 권위주의 정권과 북한의 1인 독재정권이 펼친 국가 주도의 가부장제는 제도적 디자인은 물론 현실에서 작동하는 방식까지 닮았다. 그리고 그 핵심에 있는 연결 고리는 바로 한국전쟁과 군사주의를 기반으로 한 ‘군대’였다.
북한이탈주민 여성은 한반도 가부장제의 횡단적 증인이다. 북한이탈주민 여성들은 북한에서 북중 접경지역을 거쳐, 또 다시 남한의 가부장적 사회로 건너오며 끊임없이 생존을 모색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이용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를 전복적으로 활용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이처럼 한반도의 가부장제, 더 넓게는 동아시아의 가부장제가 교차하는 지점에 탈북 여성들이 있다.
분단국 여성들은 이분법적 젠더 질서에 순응할 것을 요구받는다. 종전을 하지 않은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공동체의 구성원은 전쟁 준비를 위한 객체로 전락한다. 평화체제에 대한 약속과 보장이 없는 전후戰後는 또 다른 전쟁 준비를 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임무와 여성의 임무는 전쟁준비기 에도 전시와 다름없이 전통적 성 역할 관념에 따라 뚜렷하게 구분된다. 즉, 남성은 ‘보호하는 자’, 여성은 ‘보호받는 자’가 되어 각자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 요구된다.
분단 70년이 넘는 동안 축적된 젠더 모순은 통일 과정에서 더욱 첨예하게 드러날 것이다. 일방이 일방을 흡수하는 폭력적인 방식의 통일은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젠더 폭력 또한 묵인할 가능성이 크다. 남북 여성 사이에도 적지 않은 격차와 균열이 생기면서 여성들 내부의 차이가 크게 부각될 것이다. 이것이 여성주의적 관점을 담은 통일 방식은 무엇인가,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여성들이 맞닥뜨려야 할 현실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 미리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분단국 청년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 한반도 분단이라는 ‘더 시급한 사안’ 앞에서 늘 착취당하고 소외되어온 여성, 끊임없이 자기를 검열하고도 승자가 되지 못하는 스스로를 혐오하며 그것을 여성혐오로 표출하는 남성, ‘나중에’를 연호하는 사회 속에서 아직까지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소수자. 이들은 저마다 부조리한 젠더 현실에서 유래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페미니즘에서 구원을 발견했다. 페미니즘은 이들이 분단국의 청년으로 살아가는 아픔을 야기한 사회 구조를 파악하고 이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해주었다. 이 책에는 저자들이 저마다의 젠더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경험했던 아픔들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으며,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그 아픔의 근원을 분단이라는 현실에서 추적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북한·통일 관련 연구와 젠더 연구의 ‘접점’이 부재하다는 것이었다. 학부 때부터 흔히 접했던 북한·통일 연구에는 젠더 감수성을 담은 책이나 논문이 흔치 않았다. 그리고 반대로 여성학 분야에서는 분단 문제에 대한 관심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두 관점을 흥미롭게 접목시킨 일부 선구자적인 학자들의 연구를 제외하면 이 둘을 접목시키는 시도는 아직 부족했다. 북한 여성 연구는 양적으로 꽤 축적되었으나 페미니즘적 시선에서 북한의, 한반도의 젠더 관계를 바라보는 연구는 극히 드물었다. 이러한 사각지대를 한번 파고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반도 문제와 젠더를 어떻게 엮을 수 있을까? 탄생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해 보였다. 나는 한반도 분단을 섹슈얼리티의 관점에서 해체하고 분석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_25쪽
정리하자면, 군사적 대결 상태든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협상 단계든, 분단체제가 지속되는 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답보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으며, 여성들의 삶은 계속해서 분단국 젠더정치 속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간 통일 담론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주변으로 밀려난 것도, 평화에 대한 여성주의적 논의가 널리 확산되지 못한 것도 모두 여기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한반도 내의 여성과 남성 그리고 젠더퀴어Genderqueer까지 모두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으려면, 이분법적이고 폭력적인 젠더 이데올로기를 통해 우리를 겹겹이 억압하고 있는 분단구조에서 탈피해야만 한다. _58쪽
나는 남성으로 태어나서 남성으로 살아왔고 아마 앞으로도 남성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도 남성과 남성의 생애, 남성의 위치 등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채로 성별과 성차에 대해 논한다면 그건 그럴싸한 자기 포장이거나 위선이다. 그럴 바엔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내게는 그렇다. _70쪽
남성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언제나 변화하며, 그 안에는 모순이 가득하고, 완벽하게 성취할 수도 없는 이상이다. 다만 남성성을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를 돌아볼 수는 있다. 어쩌면 내가 한국에 태어난 남자라는 사실을 차근차근 돌아보고 짚어보는 일이 내가 실천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하나가 아닐까. _73쪽
이것이 승자남성과 패자남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승자남성과 패자남성을 가르는 기준은 무척이나 다양하며 엄혹하다. 남성으로서, 승자남성과 패자남성이 갈라지는 수많은 기준이 있으며 이 또한 부조리하다는 점을 자각할 수 있다면,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부조리한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면, 자신이 가진 승자성과 패자성을 동시에 인지할 수 있다면 페미니즘이 문제 제기하는 부조리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승자남성과 패자남성의 구분은 그 출발점일 수 있다. _98쪽
대선이 끝나고 나라는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재정비를 끝낸 나라는 앞으로 향했다. 평창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성과를 이뤄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양측 정상 부부가 함께 있는 장면은 화제가 되었는데, 특히 공식 석상에 부인을 대동하지 않았던 과거와 달리 김정은이 리설주 여사를 등장시킨 것은 정상국가로 거듭나고자 하는 의중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들이 제기되었다. 또한 문재인-김정숙 부부, 김정은-리설주 부부의 모습이 흡사 부모와 아들 내외 같은 안정적인 그림이 연출되었다고 여겨졌다. 정상국가로 거듭나기 위한 쇼맨십으로 부인과의 대동을 선택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째서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이성애자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모든 의혹을 떨쳐버리는 것이 정상국가의 정상으로서의 첫 번째 단계였을까. _207쪽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말은 단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와 적의 구도가 아닌 각각의 위치에 놓여 있는, 그 위치 역시 언제나 변화하고 있는 유동적인 개인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과 연대. 단결하여 승리하자고 외치는 진보가 누구의 진보인지,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감추거나 없애는 방식의 단결을 통한 진보라면 그것을 전 사회적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질문하는 이들이 확대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통해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틀렸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들은 분열하여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펼쳐지고 있다. _218쪽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청년이 짜는 판 룰디스
민혜영 , 강남규, 김태형, 손진원 지음 | 들녘 | 2019년 03월 29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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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 장의 형성부터 『82년생 김지영』에 이르는
남성 중심 문단 체제에 맞선 여성들의 저항「광년의 계보학」은 ?82년생 김지영?에 앞서 나타난 ‘광녀’들의 계보학을 구상한다. 『82년생 김지영』은 ‘김지영’이 정신과 의사와 이야기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그녀의 삶을 재구성하는 소설이다. 김지영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현대사회가 어떻게 한 여성을 ‘미치게’ 만드는지 반추하게 된다. 미셸 푸코가 사회적으로 강제된 기준에서 탈각한 자들이 ‘광인’으로 취급됐다고 말하듯. 여성들도 마찬가지 일을 겪어왔다. 글쓴이는 『82년생 김지영』의 분석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 여성이 ‘광녀’가 되는 과정을 다룬 한국 소설들로 그 주제범위를 확장한다. 20세기 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각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어떤 여성상을 요구했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수많은 여성이 타자화되었는지, ‘광녀’가 등장하는 소설들을 통해 재사유해볼 수 있다.
「‘여성 문인’의 탄생」은 한국 근대의 여성문학이 미디어 매체를 통해 발전하고 남성 중심의 문단이 젠더정치를 통해 여성 문인들을 억압해온 역사를 드러낸다. 근대 미디어가 가장 번성했던 1920~30년대 대한민국에서 근대문학 장이 형성되고 여성문학이 성립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당시 사회분위기와 문단이 그들을 정의한 ‘여류작가’라는 개념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었는지, 그와 더불어 여성소설가의 작품은 물론 그 작품에 안에 녹아 있는 ‘여성으로서의 삶’이 어떻게 괄시받았는지를 분석한다. 나아가 여성들의 글쓰기가 미디어 매체와 남성 중심의 문학 장과 쟁투해온 역사적 과정을 짚어본다.
국적과 장르를 넘나드는 여성의 서사를 만나다
「낭만과 현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은 선택」은 독자들에게 친숙한 ?오만과 편견?과 ?제인 에어?를 낯설게 읽음으로써 여성 서사가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어디쯤에 정박하는지를 탐독한다. 근대의 ‘소설’이라는 장르가 막 움트기 시작한 시대, 고전 여성작가들의 대표적인 소설인 『제인 에어』 『오만과 편견』 속 인물의 삶을 현대의 눈으로 재조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이 작품 속에 나타난 여성들이 체제에 굴복하고 순응한 게 아닌, 그 시대의 여성이 왜 그런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통찰하고, 사회구조 모순의 극복을 위한 도구로서 ‘연대’의 의의를 앞세운다.
「로맨스, 전복의 가능성을 묻다」는 로맨스 소설을 천착하는 흥미로운 글이다. 로맨스의 의미와 한국 땅에서 로맨스 소설의 역사를 살피고, 로맨스 소설의 전복 가능성에 대한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로맨스’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여성의 욕망이 ‘로맨스’ 소설의 텍스트에서 발현되는가를 면밀히 들여다본다. 한국에 본격적으로 로맨스가 수입된 역사와 한국형 로맨스의 발달 특징, 웹소설에서 로맨스의 경향을 살펴봄으로써 시대에 따라 여성의 욕망이 로맨스 소설에 구현되는 양상을 확인한다. 글쓴이는 여성의 욕망이 폭넓게 수용되는 유용한 장르로서 ‘로맨스 소설’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에만 국한시키고, 여성을 어머니나 주부 혹은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한정시키며 보는 것은 전형적인 남성 중심 사회의 시각을 드러낸다. 그 시절 모두가 되고 싶어 하는 전업주부가 된 중산층 여성들이 겪는 우울증과 불행과 같은 ‘이름 모를 병’이 바로 영선의 병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자연적이고 몰역사적이고 본능적인 ‘여성의 자리’라고 생각되는 ‘전업주부’가 과연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전업주부’는 그 시대에만 나올 수 있었던 독특한 시대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_25쪽
이와 같은 배제의 메커니즘은 근대 미디어와 긴밀하게 엮여 있던 문학 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근대 문학은 그 내부의 범주화를 통해 각종 ‘차이’와 ‘위계’를 설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성 문학 또한 그 과정에서 특수한 영역으로 범주화되어, 근대 문학 장은 각각의 개별적인 여성들의 문학을 ‘여류’ 라는 이름하에 성별화된 정체성의 범주로 묶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이 와중에 ‘여성 문학’은 타자의 위치에, 기존 남성들의 문학은 보편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이후 여성들의 문학을 평가함에 있어 성별적 특성을 평가 지표로 삼게 된다. _70쪽
여성들이 독신이고, 생활이 어렵다면 『제인 에어』의 제인처럼 학교의 교사나 가정교사, 그도 아니면 더 낮은 계급의 하녀 정도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제인 오스틴이나 샬럿 브론테를 비롯한 브론테 자매처럼 작가가 되는 것도 아주 드문 일이었다. (…)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젠트리 계급 여성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되었다. 첫 번째로는 재산을 가진 남성과 결혼해 중류층 계급의 삶을 이어가는 방식이 있었다. 두 번째로는 독신으로 남아 부모나 다른 남자 형제에게 신변을 위탁하는 방법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낮은 계급의 가정교사가 되어 고용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길이 있었다. _107쪽
장르문학계 안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참여하는 것에 문제가 되지 않았던 장르는 로맨스 딱 하나뿐이었다. 판타지를 쓰거나 읽는 여성, 무협을 쓰거나 읽는 여성…. 이들에게 “여자가 이런 것도 봐?”라든가 “역시 여성 작가다운 섬세한 필체!” 운운하는 것처럼, 여성들이 읽고 쓰는 행위에는 언제나 삐딱한 시선이 있어왔다. (…) 문학이 헤테로 남성을 기본으로 상정하고 창작되고 읽혔다면, 사랑 이야기, 로맨스만큼은 여성의 것이라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었다. _179~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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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알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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