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출근길. 사람으로 가득 실린 지하철은 버겁기만 하다. 모두가 서울로, 서울로 가는 지금 수도권 외곽에 사는 청년들의 삶은 고루하기만 하다. 집, 회사, 집, 회사 ... 반복에 지쳐가는 당신에게 과연 동네 무엇인가요? 지역은 어떤 곳인가요?
경기도 고양시. 인구 100만이 넘는 대규모 지자체이다. 그러나 많은 청년들에게는 서울로 출근하기 위해 잠깐 잠자는 공간에 불과하기도 하다. 날이 갈수록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사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청년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안타까움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번뜩이고 재치 넘치는 기획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다. 고양시의 사람공동체 '리드미(Read Me)'다. 이제 마을에서 터를 잡고 활동한 지 2년을 조금 넘긴 리드미의 신정현 대표를 만났다.
"서울권을 제외한 수도권에 살고있는 '청년'에게 마을이란 단어 자체가 생소합니다.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도 많고 먹고 사느라 너무 바쁘기도 하고요. 더구나 청년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지만 정작 마을에는 만날 수 있는 청년을 찾기도 힘들고 청년을 만나더라도 함께 이야기를 누고 무언가를 해 볼 공유공간조차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저 모이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바쁜 일상에 지쳐있던 청년들이 어렵사리 한자리에 모였지만 처음 대면했던 그 날의 어색함은 잊을 수가 없었죠. 무언가 근사하고 대단한 일들을 해보자고 제안할 수도 있었지만 그 무엇을 하기 전에 우선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일이 목적이 되기보다 사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사람이 목적인 리드미의 시작은 사람도서관이었던 샘이죠."
각자의 꿈, 각자의 바램,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모였어요.
신정현 대표를 만나러 간 날은 마침 리드미가 주최하는 ‘청년공동체의 밤’이 열리고 있었다. 청년공동체의 밤 이라고 명명된 송년회는 특별했다. 각자의 꿈을 발표하고 한 사람의 꿈을 구체화하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테이블토크가 진행되었다. 2년 전 그들이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에 모두가 경청하고 있었다. 이 날 리드미가 운영하는 마을공유공간 ‘더낮은마을공간 지하’에 필요한 물품을 기부 받는 행사도 있었다. A4용지부터 간판, 제습기까지. 지역 주민들은 청년들의 활동을 위해 선뜻 참여해주었다. 70평이 넘는 공간을 자세히 보니 다 기부 받은 물건들이었다.
"지금 이 공간도 모두 기부 받았습니다. 작은 소품 하나까지도요. 무언가 조화될 수 없는 가구들과 물품들이 모여 있음에도 신기할만큼 잘 어울리죠? 어쩌면 리드미가 너무나 다른 개성과 철학을 가진 청년들로 구성됐지만 기가 막히게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이런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하셨던 마을 어른이 이 공간을 무상으로 내어주셨어요. 그럼에도 인테리어를 위한 비용은 우리가 부담해야 했죠. 이 때 경기도에서 시행하는 ‘따복공간조성사업’에 지원했었는데 당시 경쟁률이 7:1이나 됐습니다. 당시 공간조성 사업 면접에서 "우리는 이 공간사업을 지원받지 못하면 모아둔 결혼자금을 다 털어서라도 공간을 만들어 낼 겁니다! 우리가 결혼을 포기하지 않고 마을활동을 해 나가게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던 게 잘 되서 이 공간의 인테리어 비용을 지원을 받게 되었어요. 여기에 투여되는 대부분의 노동도 청년들이 직접 한 겁니다. 그야말로 시민들의 후원과 행정의 지원, 청년들의 땀으로 만들어 낸 마을공간이 탄생한 것이죠."
신정현 대표의 말에서는 뿌듯함이 묻어나왔다. 그렇게 처음에 8명의 청년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한 '리드미'는 어느덧 중학생부터 80대 노인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28권의 사람책이 모여지고 마을 곳곳에서 27회의 사람도서관을 개최하였다. 더 풍성한 소통과 관계, 그리고 재미를 위해서 마을라디오, 청년농부학교, 청년인문학모임, 청년기본조례운듕, 청년공동체학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즉 이제는 25명의 꿈이 리드미에서 이야기되고 사업으로 구현되고 지역사회와 어우러지고 있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리드미라는 공동체는 25명의 멤버들이 활동하는 청년단체로 성장하었다.
마을에서는 '모두가 선생이고 모두가 학생'
"리드미는 동네형누나언니오빠가 동생들을 챙기는 것을 가장 가치있게 생각해요. 그래서 올해 초 '꿈의학교 비밀기지‘라는 대안학교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25명의 청소년들이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만들고 자신들이 꿈꾸는 것을 해 보자는 것이죠. 이 공간에서는 모두가 학생이자 모두가 선생이 되는 게 원칙이었어요. 청소년들이 배우고 싶은 거, 알고싶은 거, 잘 할 수 있는 것 등을 공유하면서 다양한 세대가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리드미의 콘셉트는 사람도서관이다. 신정현씨는 평범한 누군가에게도 삶의 특별한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특별한 '무엇'을 발견하는게 리드미의 역할이다. 리드미에서 각자의 이야기와 삶을 경청하면서 여러 이야기가 사업으로 현실화되었다. 청년학교 이외에도 리드미는 '마을라디오'를 만들어 마을 뉴스를 전하고, '청년새참'으로 청년들이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다.
리드미는 내년에 더 다양하고 재미있는 사업을 진행하려고 한다. 이날 행사에서 나온 각자의 꿈들은 모두 각자의 꿈과 철학, 개성이 담겨있었다. '우리 모두가 뉴스의 제작자이면서 또 수요자가 되는 마을미디어를 만들겠다'라는 청년부터 '마을 주민들의 손으로 직접 제작하고 공유하는 마을영화제를 만들겠다'라는 청년까지... 그들의 도전의 출발점에는 ‘사람공동체 리드미’라는 든든한 비빌언덕이 있었다.
그렇다면 신정현 대표는 어떻게 마을로 와서 청년활동가가 되었을까?
"2012년에 강정마을에 있었어요. 마을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주민들과 같이 제주해군기지를 반대하는 활동을 했어요. 평화로운 마을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폭력적으로 해군기지를 세우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주평화십만송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해군기지반대를 위한 국민청원운동을 시작했어요. 그 활동과정에서 목과 팔에 깁스를 하고 다녀야 하는 고통도 겪었고 검찰로부터 10개월 구형도 받았어요. 제 나름대로는 치열하게 활동을 한 거예요.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어요. 우리 편인 듯 보였던 정치인들도 표가 안된다고 판단하니 강정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져버리더라구요.
패배감과 무력감이 가득할 때 눈 앞에 보인 게 바로 '마을'이었어요. 마을에서 이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될 거란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보니 막상 기댈 청년이 없는 거예요. 고양시 인구가 100만이니 30만명은 청년일 텐데 그 많은 청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이 물음에서 시작했어요. 알고 보니 없는게 아니고 숨어있었어요. 극단적으로 개인화되어 버린 우리 사회에서 청년은 자기자신을 꽁꽁 숨겨 놓았던 것이죠. 나의 이야기를 오픈하는 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나의 삶의 이야기가 공감과 경청의 과정을 거쳐 치유와 회복의 단계로 가는 것을 본 뒤 더 많은 청년,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수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과정에서 사람책과 독자 사이에는 놀라운 신뢰가 쌓이는 게 보였어요. 단절되어 있던 관계가 형성되고 서로가 공존하는 공동체가 되어가는 게 보였죠. 그게 얼마나 기쁘던지, 그렇게 리드미는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관계재’를 생산하는 청년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리드미의 콘셉트인 '사람도서관'의 출발은 덴마크와 영국에서 깨진 관계와 신뢰의 회복을 위한 비폭력평화프로젝트였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싸움에 너는 왜 가해자가 되었고 피해자가 되었는지 서로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과정이 사람도서관이었다. 신정현 대표는 청년이 없는 공동체의 현실과 청년에 초점을 맞춘 사람도서관을 진행한 셈이다.
지난 7월부터 3개월간 리드미는 고양시 청년활동가들과 함께 고양시 청년 320여명을 대상으로 청년실태조사를 했다. 이 조사과정에서 고양시 청년들 중 85%는 '계층이동이 어렵다'고 밝혔으며 89%는 '나를 위한 법제도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만큼 청년들의 삶은 어렵고 변화의 목소리는 큰 셈이다, 그러나 현재 고양시에 청년 이름 단 조례는 단 하나도 없다. 당장 리드미가 운영하는 마을공유공간도 청년 스스로 노력을 통해 만들었다.
“현재 고양시 청년활동가들의 핵심목표는 청년담당부서를 만들고 청년당사자가 청년 정책을 만드는데 참여하는 거예요. 이를 위해 내년 1호 조례안으로 청년기본조례를 고양시에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고양시에 존재하지 않던 청년생태계를 만들어 가고 싶어요. 이는 단순히 청년들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와 지역 그리고 고양시 전체 문제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신정현씨는 고양시가 청년들이 마음 놓고 꿈을 실천할 수 있는 지자체로 거듭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또한 공동체가 사회적 안전망을 건설해 먹고사는 문제에 바쁜 청년들의 대안공간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고도 밝혔다. 청년과 지역공동체를 연계해 활동하는 그의 말에는 늘 자신감이 묻어났다.
"사람이 돈이 없다고 밥을 못 먹고 결혼을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요. 우리 사회 점 조직. 즉 공동체가 많아지면 좋겠어요. 사람을 목적으로 하는 따뜻한 공동체요. 그곳에서 밥도 먹고 결혼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는 공간이 만들어주고 청년들이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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