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민주항쟁 30주년, 그 의미를 찾는 여정을 정리하기 위해 ‘6월민주포럼’과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이 좌담을 준비했다. ▲김중배 대기자(당시 50대, <동아일보> 논설위원),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당시 40대, 화가), ▲박석운 진보연대 대표(당시 30대, 노동운동가), ▲ 전민용 전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 회장(당시 20대, 치과대학생),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 박영민 바꿈 활동가가 좌담에 참여했다. 2017년을 기준으로 80대에서부터 20대까지, 세대를 막론한 다섯 패널이 백승헌 변호사(‘바꿈’ 이사장, 당시 변호사 2년차)의 사회로 2시간 동안 ‘6월항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백승헌(변호사, 이하 사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크게 네다섯 가지 정도의 테마를 잡고 진행해보려 한다. 30년 전 항쟁 당시 20대와 30대, 4~50대 장년층을 망라하고, 또 당시 태어나지 않았지만 역사로서 이 부분에 참여하고, 역사를 이어받은 세월호 세대가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
패널들의 연령대가 달라서 경험이 다를 것 같지만, 사실 20대인 박영민 씨를 제외하고는 통시적으로는 체험이 비슷하다는 느낌도 있다. 몸이 어디에 있었건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 가운데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6월항쟁이라는 주제를 전반적으로 평가하실 수 있는 분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먼저 6월항쟁 하면 뭐가 떠오르는지. 사적 체험과 사회적, 역사적 체험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인지부터 이야기 나누었으면 한다.
(좌담회 참석자들. 왼쪽부터 백승헌 변호사(사회), 박영민 바꿈 활동가, 김중배 전 MBC 사장, 김정헌 작가,
전민용 전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회장, 박석운 진보연대 대표 ⓒ바꿈)
▪ 30년 전 6월, 그날들의 기억
박석운(진보연대 대표, 이하 박석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거대한 성과, 위대한 승리를 했다는 점이다. 6월항쟁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7, 8월 노동대투쟁으로 이어지는 정치사회적 공간을 열고, 이어졌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권교체에 실패함으로써 ‘죽 쒀서 개줬다’는 의미도 있다.(웃음)
김정헌(화가, 이하 김정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단편적인 것만 생각이 난다. 광장에 모였던 것, 특히 故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제일 많이 모였던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구나 하는 사실에 굉장히 흥분했었다.
또, 6월항쟁에 미술이 많이 관여를 했다. 최민화 작가가 당시 많이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이한열 부활도’가 생각난다. 가운데에 부활도가 딱 놓이고, 만장이 일렬로 쫙 나오는 장면이 평생 두고두고 생각난다. 그때 광장에 모였던 체험이 2017년 촛불항쟁까지 온 게 아닐까 한다.
전민용(전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 회장, 이하 전민용) 치과대학을 다닐 때였다. 시험을 6월10일 무렵까지 본 것 같은데, 그 다음부터는 시험 거부를 결의하고 거리로 나갔다. 의대, 치대생들이 함께 부상자들을 응급 치료하는 길거리 의료팀을 구성했다. 의료인가운을 입고 있으면 어디든 갈 수가 있으니까 그 중에 일부는 연락을 담당했다. 며칠 지나니 가운 입은 사람도 (통행이) 허용 안 되고, 잡혀 가고 그랬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6월 말 무렵에 경찰들도 거의 손을 놓고 집회를 막지 않아서 거리 집회 후 대학로 같은 곳에서는 차량 통행이 안 되고 군중들이 2~30명 씩 모여 길거리 토론회가 열리곤 했다. 거리에서 시국토론을 하는 것을 그 이전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 것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세상이 바뀌는구나….
(최루탄을 피해 도망가는 시민들(1987년 6월 10일) ⓒe영상역사관)
김중배(전 MBC 사장, 이하 김중배) 그때 <동아일보> 논설위원이었는데 정말 억압과 탄압이 심했다.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현 국정원)가 (신문사에) 출입을 하고, 협박을 했었다. 당시에는 내가 매주 칼럼을 썼는데, 안기부 출입하는 요원들이 나중에는 도사가 돼서 다음 주에 뭘 쓸 지를 아는 거다. 요원들이 예견을 하는데, 기가 막히게 알았다.
그때 딸이 중학생이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누가 집에 전화를 해서 “네 애비가 그 따위로 놀면, 가족을 몰살할 텐데”(했다는 거다). 전화가 아래층에 있었는데, 우리가 위층에 있다가 안 받으니 딸아이가 받은 거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이여’ 칼럼을 쓰기 전에 사람들이 그렇게들 많이 전화를 했다. 말을 하기 전에 자꾸 운다, 통곡을 하면서. 그런가 하면 칼럼을 내보내고 나니까 영감들이 계속 전화를 했다. 그때는 SNS 없이 ‘전화부대’라는 게 있었는데, 전화를 어찌나… 요즘 어버이연합과 비슷한 건지는 모르겠다는데, ‘빨갱이 새끼 하나 뒤진 걸 가지고…’라며 정반대로 나왔다.
지금도 생각하지만, 박종철이나 이한열, 이석규는 개인의 고유명사가 아닌, 시대의 보통명사, 상징명사라는 생각을 그때부터 강하게 가졌다. 5.18광주항쟁 이후에 외국 나들이를 했는데, 광주 이야기를 아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보면 광주라는 도시가, 한 도시의 고유명사가 아닌 ‘민주’와 같은 어떤 보통명사와 같은 그런 인식으로 말씀하는 걸 많이 들었다. 박종철도 그렇게 생각했다.
전민용 대표가 말씀하시니, 6월26일(국민평화대행진)이 상당히 셌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사망한 박연채라는 친구하고 돌아다니는데, 최루탄이, 최루탄 폭격이 맹렬했다. 그때 나는 호암재단 앞으로 가고 있는데, 어떻게 (최루탄을) 쏘아대든지 막 밀려다녔다. 당시 우리 학생들이 용감하게 (전경을) 쫓아가서 사과탄(최루탄의 일종)을 탈취하고 난리가 나고 그랬다. 그렇게 쫓아다니다보니까 좀 피곤해서, 쉬려고 이렇게 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내가 원래 까무잡잡한데, 의대생들이 보더니 ‘저 양반이 변고가 났나’ 해서 ‘선생님, 괜찮습니까?’ 하는 거다.(웃음) 지금도 선하다. 그때 의대 진료반원으로 나온 청년들을 지금도 기억한다.
또, (최루탄 때문에) 눈물이 나고 하니까 건물 화장실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잔뜩 있다. 전경들도 들어온다. 그러면 전경들이 그런다. ‘선생님들, 이렇게(눈 부미면서) 씻지 마세요. 물 뿌리세요.’
이 말씀을 장황하게 드린 이유는, 일련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에로스효과(Eros Effect)라고 할까. 사랑과 자유와 연대, 공감, 감수성 이런 것이, 말을 나누지 않았더라도,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생긴 거다.) 그 연장 확대판이 촛불이라고 생각한다. 으레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데 그런 에로스 효과가 가슴에 남아 있다.
전민용 우리도 식염수 가지고 다니면서 씻어 줬다. 그런데 최루탄 터지면 (진료를) 못 하니까, (의료팀은 나가기 전에) 눈에 마취 앰풀을 떨어뜨렸다. 그럼 마취가 돼서 따갑지 않다.
김중배 6월26인가 그랬다.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진출했는데, 우리는 <동아일보>에 있으니까 (신문로에 있는 사옥) 창문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광화문에서 (경찰과) 딱 대치를 했다. 그러니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지도부에서 ‘더 이상 가지 말자’ (했다.) 그러니까 젊은 여성들이 꽃송이를 들고 전경들 가슴에 꽂아주고…. (웃음)
그때는 대학교수들이 <동아일보> 논설위원실에 다녔는데, 고려대 김충렬 교수가 올라 왔다. ‘청와대까지 가야하는데, 여기서 끝나면 안 되는데’ (그랬다). 듣기에 따라서는 ‘무모하다’고 생각이 될 수도 있었지만, ‘청와대까지 가봤자 뭐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들이 있었다.
김정헌 문화예술 쪽에서는 그때가 제일 활발하게. 우리가 그때 막 만들어놓은 ‘그림마당 민’이라는 전시장이 있었다. 유홍철, 김용태 이렇게 해서 참 어렵게 장소를 만들었는데, 거의 처음하다시피 한 전시회가 ‘반고문전’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나자마자 87년 3월에, 물고문에 의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는,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하고 ‘반(反)고문전’을 열었다.
그때 신학철 작가도 아주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었는데, 박불똥이라는 작가는 전경들이 전두환을 붙잡아서 연행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걸 ‘반고문전’에 붙여 놨었다. 종로경찰서 대공과와 정보과가 항상 전시장을 드나들며 감시했는데, ‘반고문전’이 열린다니까 들이닥쳐서 압수해 가려고 했다. 그림마당 민이 지하에 있었는데, 거기서 밀고 당기고를 했다. 결국 몇 명이 연행당하고, 작품을 자진 철수하는 조건으로 해서…전시를 며칠 못하고 문을 닫고 끝냈다.
또 이애주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부터 해서 그때 활약들을 했다. 이애주가 춤을 췄다. 문화예술이 그때를 전후해서 막 폭발적으로 꽃을 피웠다. 문화예술 계에서는 6월항쟁이 아주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사회 네 분이 직업도 다르고 했지만 광장에서 다 만났다. 저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당시 2년차 변호사였다. 변호사들이 해방이후 처음으로 변호사 이름을 걸로 집단적으로 거리시위에 나섰고, 그러한 활동이 나중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결성으로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는 그 시위에서 최루탄을 맞아서, 수포로 조금은 고생했고 그 상흔이 오랫동안 남아 6월을 기념하기도 했다(웃음).
(故 이한열 열사 장례식(1987년 7월 9일) ⓒe영상역사관)
박영민(세상을바꾸는꿈 활동가, 이하 박영민) 나는 중학생 때 역사책에서 배운 게 기억이 난다.
김정헌 역사교과서에 그런 게 나오나?
박영민 역사와 관련된 책에는 다 나온다. 6월항쟁만 단독으로 나오기 보다는, 3.1운동부터 시작해서 이 땅에 이런 항쟁이 있었다는 그런 걸 가르쳐 준다. 6월항쟁에 대해 이렇게 길게 고민해본 건,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를 하면서 사실상 처음이다.
사회 어쨌든 현 20대를 세월호세대라고도 하고, 촛불세대라고도 하는데, 촛불집회가 시작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이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았나?
박영민 6월항쟁이 촛불집회 때문에 더 새롭게 다가오는 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런데 선생님들 뵙고 인터뷰를 하려면, 이 분들이 예전에 뭘 했는지 조사를 해야 되지 않나. 조사를 하면서 더 느껴지는 게 있다. 대학에서 북한학을 전공했는데,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말을 쓴다. 통일이라는 것을 하나의 사건이 아닌 통일로 가는 노력 전체, 과정 전체를 통일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선생님들 뵈면서 6월항쟁 역시 그렇게 다가왔다. 항쟁의 당사자였던 선생님들이 6월 어느 날에만 운동을 딱 하고 끝낸 게 아니었지 않나. 3~50년에 걸친 세월 동안 민주주의 하나 보고 계속 걸어온 발자취가 있는 거니까. 과정으로서 항쟁이 뭔지 최근에 고민을 좀 하는 것 같다.
김중배 중학교 때 배운 것이 몇 년도였나?
박영민 2천년대 중반 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임기 말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노무현 대통령 때 초등학교, 이명박 대통령 때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김중배 6월 10주년 때(1997년) 서울대에서 강의를 했는데, 서울대 학생들에게 6월항쟁 이야기를 했더니 모르는 애들이 많았다.
박석운 그래서 교과서가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저들이 교과서를 바꾸려 하는 것이고. 정권이 바뀌고 교과서가 바뀌면서, 그 뒤 세대는 6월항쟁에 대해 알게 됐다.
사회 결국 체험이 어떻게 전승되느냐의 문제인데, 과거를 어찌 기억하는지와 현재와 연결되는 강도가 현실을 끌어가는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에게, 혹은 우리 사회에 6월항쟁은 어떤 의미로 남아있다고 보시나.
▪ 30년 후 되돌아본 6월항쟁
김정헌 앞서 이야기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미술의 밑받침이다. 88년에 개인전을 했는데 작가들은 그 전부터 준비를 한다, 1년 전부터. 그때 일기식으로 쓴 노트를 보니, ‘반고문전’ 준비에서부터, ‘이렇게 내가 농촌하고 관련된 그림을 편하게 그려도 되는가’ 이런 자각심도 생겼더라. 일종의 문화적인 각성 같은 걸 6월항쟁 때 몸에 새긴 게 아닐까 한다. 6월항쟁을 거치며 나라는 사람이 아주 용감해 진 것 같다.
사람이 달라지면 안에서 그때 길러진 에너지가 알게 모르게 작동하는 것 같다. 그 전에는 집회 같은 데에서 노래를 같이 부르는 걸 쑥스러워 하고, 손도 올라가다 말고 그러다 끝났는데, 그 다음부터는 확확 올라갔다. 모르는 사람들하고 섞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뻔뻔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대신 세상을 상당히 용감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행동이 뒤따른 게 아닌가.
(왼쪽부터 김정헌 작가, 김중배 전 사장, 박석운 대표 ⓒ바꿈)
김중배 이 얘기를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좌담회 오면서 생각을 했다. 나는 4.19혁명 이전에 신문기자가 돼서 4.19혁명과 5.16쿠데타, 5.18광주항쟁, 그리고 6월항쟁을 다 겪은 세대다. 4.19혁명 때는 그렇지 않은 데도 있었지만, 한국 언론 대부분이 시민, 민중들에게 굉장한 지지를 받았다.
그때는 신문사가 귀했다. 방송사로는 KBS가 있었지만 관영방송이었다. 신문사 취재하는 사람들이 지프차를 타고, 신문사 깃발을 꽂고 다녔는데 <동아일보>가 제일 환대를 받았다. 나는 <한국일보>에 있었는데 <한국일보>도 그런 지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통한으로 남아서 6월항쟁을 그런 각도에서 생각을 하는 것이, 저항을 하지 못했다. 물론 사회전체가 이렇다하게 저항을 못했지만, 언론은 더군다나 저항을 못했다. 저항의 역사적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부끄럽고, 통탄스러운 흔적이다.
그런 세월을 겪다가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5월광주항쟁에서 학살하고, 그리고 또 숨 죽여서 살았다. 그 시대의 축적, 분노와 착취, 억압의 아픔이 6월이라는 총체적인 그림으로, 김정헌 선생 말씀 받아서 얘기하자면 ‘그림으로 등장한 하나의 분화구’ 같은 것이었다.
이 말씀을 구태여 드리는 것은 촛불집회를 하고 정권이 교체됐지만, 실질적인 사회‧정치‧경제학적 ‘기축 기둥’은 거의 박정희 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으로 박정희 시대의 신화, 마르크스적으로 말하면 박정희의 유령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바탕에는 지금도 이것이 기능하고 있는 그런 시대에 살았다. 문화‧예술계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언론계는 통탄스럽고 부끄러운 시대에서 조금 탈출하려고 하는데 미수에 그쳤다.
박석운 언론의 저항 말씀하셨는데,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당시 <동아일보>가 보여줬던 나름의 기여들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김중배 조금은 있었다.
박석운 그때는 <한겨레>도 창간되기 전이었다. 통제의 틈바구니를 뚫고, <동아일보>에서 언뜻 비치면서 뚫고 나오는, 그래서 김중배 선생께 협박까지 하는 그런 사태까지 벌어질 정도로 <동아>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당시에는 상당한 역할을 했다. 비록 지금은 <동아>가 엉망이 돼 버렸지만.
김중배 이 얘기가 6월항쟁과 관련 있을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언론이 지금보다 훨씬 부자유스러웠다. 나 같은 사람도 남산에 끌려 다니기도 했다. 지하 벙커가 남아 있더라고.
종합적으로 느끼기에는 그때는 통제를 받고 제대로 보도 못하고, 거기에 대해서 신문사에서 소속된 기자들이 우리가 정말로 마땅히 내보내야 될 진실을 못 내보내고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 공감대가 일부 사주까지, 이를테면 <동아> 같으면 김상만 씨 정도는 공감했다. 내가 현역(언론인)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잖나. 그런 점에서는 굉장히 달라졌다. 굉장히 퇴행했다.
박석운 그 당시 6월항쟁이 나름의 성과를 낸 배경으로는 축적된 모순, 누적된 민심 이반들이 있었다. 광주항쟁이 완전히 진압되고, 그 이후에 학생들의 처절한 투쟁들이 진행됐고,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유화국면’으로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뚫고 이런저런 민주화운동들이 움을 트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1985년) 2.12 총선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86년) 개헌 현판식 때, 5.3인천사태 등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탄압이 계속됐고 저항들도 계속됐다. 저항의 아주 큰 줄기가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 그리고 보도지침에 대한 폭로와 저항, 그러다가 박종철 고문치사가 터졌다. 모순의 강도가 훨씬 더 세지고, 그에 대한 저항도 질적으로 고양되는 과정을 거쳤다. 누적된 민심이반, 그게 (6월항쟁의) 배경이 됐다는 거다.
실제로 6월항쟁이 그 정도로 전국으로 번지게 된 데에는 미시적으로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 6월 10일이라는 날짜에 주목해야 한다. 많이들 놓치는 부분인데, 6월10일 국민대회 때 초장에 경찰들이 요사이처럼 압도적으로 막았다면 성공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됐나. 그날 잠실운동장에서 노태우를 민정당의 다음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지명대회가 있었다. 그래서 주요 경력들이 다 강남에, 잠실운동장 근처를 철통같이 에워쌌다. 그 바람에 시내에 허술한 공간이 생겼다. 분노한 시민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동 가능한 공간이 생긴 거다. 모순의 한 결과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명동성당이다. 초전박살을 당하지 않고 커지면서 세(勢)가 붙었다. 세가 붙은 상황에서 탄압을 당했다. 토끼몰이 당하듯이 해서 명동성당으로 밀려 들어갔는데, 김수환 추기경 등 가톨릭에서 방어를 해줬다. 가뜩이나 민심이 이반된 상태에서, 가톨릭과 전면전을 해야 하는 부담이 전두환정권에게 생겼다. 그래서 준-해방구 거점이 형성됐고, 그 거점을 중심으로 어떤 사람들은 ‘구출하러 가자’고 하고, 넥타이부대가 나서고, 전국적으로 상징적인 공간이 된 거다. 언론에서도 핵심 이슈가 됐다.
세 번째는 전두환정권이 계엄을 선포해야겠다는 고민을 하게 만든 동시에, 결국 계엄을 선포 못하게 된 원인이기도 한데 (6월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는 점이다. 명동성당이 거점이 되면서 거기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전국 방방곳곳에서 집회가 있었다.
나는 노동운동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 뿐 아니라 수도권의 이른바 주요 위성도시들을 다니면서 가담을 하고, 판세를 봤다. 전두환정권은 서울을 방어하기도 급급한 상황이었고, 전체적으로는 무인지경이었다. 경찰들이 기가 죽어서 거점방어만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수도권에서의 시위가 굉장했다. 그런 양상들이 전국화되면서 경찰들이 압도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되어버린 거다.
(1987년 6월 10일 명동성당 앞에 모인 시민들의 모습 ⓒe영상역사관)
본래 경찰은 대규모 집회에서 방어를 할 때, 전국의 경력을 거점에 다 모아서 수적인 우세를 잡으면서 철통방어를 한다. 그런데 그걸 못하게 됐다. 각 지역의 경찰들이 자기 지역 거점을 방어하는데 급급했고, 그 바람에 지역 대도시, 중소도시들은 무인지경이 됐다.
계엄령을 내리지 못한 게 일각에서는 미국의 개입 때문이라고 하고, 일부 그런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미 시민들이 군중화되어서 전국적으로 준-해방구에 가까운 양상을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인을 투입하면 끝장이 나는, 전면전 내지 엄청난 유혈사태로 가면서 판이 뒤집히는 양상으로 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이 계엄 선포를 검토하다가 못했지 않나 생각한다.
또, 앞서 이한열 장례식을 말씀하셨는데, 이한열 열사 장례는 (노태우의 6.29선언 다음이니까) 6월항쟁의 중간 결과로 봐야 한다고 본다. 열린 공간에서 장례식이라는 계기를 잡아서 국민들이 대규모로 모인 것이고, 6월항쟁의 본질은 그 장례식 이전에 전국적으로 무인지경 내지 최루탄 맞아가면서 동시다발 내지 대규모 각각 현장에서 굉장히 열심히 많은 민초들이 함께 나서서 싸웠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저는 6.29까지 들불처럼 번져가는 과정이 1단계, 2단계가 이한열 장례, 3단계가 7월~8월의 노동자대투쟁이라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선 과정에서 죽 쒀서 개 주는.
김중배 6월18일 계엄론은 여러 가지 증언과 기록이 있다. 전두환 정권에서 사실은 계엄을 준비를 했다. 여기에 미국이 반대를 했고, 경찰도 군대까지 동원해서 전국을 제압하기 어렵거니와 오히려 더 반발을 살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또 일부 증언들에 따르면, 군 내부에서 별로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계엄령을 하려고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동아>에서 칼럼 쓸 때인데, 정치부의 어떤 기자가 급히 만나자고 하더니 나더러 어디 좀 가 있으라고, 계엄령 내린다고 했다. 계염령을 내리면서 전국 검거령까지 준비가 됐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도망을 갔는데,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사회 내 사무실이 당시 서소문에 있었다. 6.10 이후부터 6.29 되기 전까지는 직장인들이 산발적으로 시위에 많이 참여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시작하고, 끝날 때 즈음에 들어가는 식의 집회들이 산발적으로 있던 상황이었다. 거기서 나한테 사무실 개업 자금을 대출해줬던 은행 대리를 만나는 일도 있었다.(웃음)
전민용 변호사들이 서명(운동)을 했는데 언제인가?
박석운 4.13 호헌 선언했기 때문에 5월 즈음이다.
전민용 호헌철폐 직선제 서명운동이 5월 무렵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민심이반이라는 게 확인되는… 치과계 쪽도 그동안 침묵하던 분들이 용기를 내어 서명에 많이 참여했다. 그 때까지도 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였는데도 여러 분야에서 꽤 확산이 됐다.
박석운 한국노총이나 주요한 관변 단체, 조직들이 다 호헌지지 선언을 했다. 한국노총은 그때 호헌 지지 선언을 해서 나중에 완전히 깨갱했다. 정권에서 호헌 여론을 조작하고, 동원하고 그랬던 거다. 그런데 민심이 이반돼 있었기 때문에 6월항쟁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사회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명운동 하는 게 운동방식이 되기도 하였다. 집단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지만 , 참여자들에게는 혼자 고립돼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생각이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용기를 내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박석운 저들(전두환 정권)은 호헌 지지 선언을 조작했지만, 민주시민들은 각계 선언으로 확산돼 가는 그런 게 굉장히 귀했다. 신문에 날 정도였다.
전민용 <동아>에서 조그맣게 실어 줬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회 그런 거 보는 게 위안이 됐다.
박석운 <동아>가 그런 역할을 했다는 거다.
전민용 이런 부문별 서명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삶의 어떤 방향에 대한 전망이 생긴 거다. 그전에는 ‘모 아니면 도’ 식으로 평생 비밀 활동을 하고 수배 받고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그렇게 살 건가, 아니면 현실을 모르는 척 적당히 눈감고 살 건가 택일해야 했다면, 부문별 서명운동 과정을 통해서 많은 치과의사들이 참여를 하고, 6월항쟁을 거치면서 대중적으로 확산이 됐고, 이런 동력을 기반으로 부문 운동들이 생긴 거다.
박석운 시국선언한 게 기초가 돼서 6월항쟁 이후에 부문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사회 민교협(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모임)이니 <한겨레신문>도 그때 이야기가 되어 시작했다.
박석운 인의협(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나 건치(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도 그렇다.
전민용 전문직이든, 예술계든 자기 분야를 가진 사람들이 서명한 힘을 가지고, 그대로 단체로 만들어 갔다. 독자적인 자신의 운동과 삶이 일치해 나갈 수 있는 게, 그게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큰 전환이었다.
사회 20대는 이해를 잘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6월항쟁에 참여했느냐, 나중에 들었느냐, 그냥 중고등학생으로 있었느냐… 이런 차이들이 있었다. 6월 항쟁때까지는 승리의 경험이 정말 희귀하였는데, 귀한 승리의 경험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자부심으로 이어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참여한 분들일 수록 승리만큼이나 6월 항쟁의 한계 내지는 미완성의 문제를 많이 지적하고, 특히 정권이 유지되었다는데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이 6월항쟁 이후에 성립된 ‘87년 체제’에 대해 긍정적 의미화 함께 극복을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87년 체제의 의의 그리고 한계의 극복
전민용 6월항쟁이 흔히 ‘죽 쒀서 개 준’ 결과가 되면서, 90년대에는 (과거로) 되돌아 간 듯한 상황이 전개됐다. 그래서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말도 있고, 앞서 박영민 씨가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말도 했지만, 민주주의도 과정으로 봐야 한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로도 완성될 수가 없다. 깨어 있는 시민들에 의해서 시기마다 계속 고민하고, 판단하고 합의하고 이러한 과정을 끊임없이 유지해나가는 그런 형태, 그런 구조 자체가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87년체제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박영민 사실 막연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이렇게 했어야지. 왜 그렇게 못 했데’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이야기를 더 들어볼수록 그게 미완성 혹은 한계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과정으로서의 항쟁을 겪고 있다. 6월항쟁도 (한 시점에) 점찍고 ‘완성됐다’고 하기보다, 30년이 지났을 때 회고하는 게 의미가 있는 것처럼 6월항쟁 때 했던 모든 것들을 87년의 완성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이걸 미완이라고 하는 건 2017년을 살고 있으니 미완이라고 얘기하는 거다. 87년 광장에 있던 사람에게 ‘두 발자국 밖에 못가는 건 미완이야’라고 하는 게 민주주의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책임은 분명 그것을 목격하고, 미래를 그리는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김중배 그 말씀이 맞다. 민주주의에는 종착역이 없다. 골(goal)이 없는 거다. 하지만 항쟁의 시대를 살았던 내 입장에서는 그 당시부터도 미완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당시 국본에서 내건 지침을 보면 ‘노동자‧농민‧도시‧빈민’ 여기부터 나온다. ‘재분배 문제’를 제기하고, ‘노동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자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나온다. 그러니까 (7, 8월)노동자대투쟁의 주제들이 국본의 강령 속에 이미 있었던 거다. 구태여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분리해서 보는 것이 성격이나 의미 부여에 명확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국본이 그걸(강령)을 이루지 못한 거다. 또, 구호로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식으로 집약하다 보니 직선제 개헌만이 6월의 목표인양 축소되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1997년 6월항쟁 10주년 사업을 할 때부터 직시를 했다. 87년체제의 극복이라는 이야기, 그것도 일리가 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87년체제의 극복이 아닌 붕괴되는 모습을 명백히 봤다. 극복하기는커녕 그 체제도 유지하지 못하면서 무슨 극복을 이야기하느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87년체제가 공고해야 한다’ 그런 의미는 아니다. 물론 극복해야겠지만, 붕괴됐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했던가. ‘촛불’이 나서서 그 국면을 넘어섰지 않은가. 87년체제를 그나마 회복시킨 거라고 본다. 그것을 토대로 가야한다.
김정헌 전민용 원장이 앞서 이야기를 했는데 ‘모든 혁명은 항상 미완으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완성인 혁명이 어디 있겠나. 김중배 선생도 잠깐 에로스효과를 말씀하셨는데, 68혁명을 감성혁명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많다.
사람 사는 사회에는 늘 기득권이 존재한다. 그걸 무너뜨린 게 그 당시 68학생 혁명이다. 양상은 조금 다르지만, 김중배 선생께서 초반에 에로스효과라고 한 말씀이 87년체제가 극복했거나 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촛불혁명까지 계속해서 가고 있다….
김중배 감성이다. 허버트 마르쿠제나 조지 카치아피카스라는 사학자들은 전염효과라고 한다. 촛불집회도 그렇다. 감수성이 없으면 안 되니까, 자유와 평등과 우애를 지향하는 해방.
전민용 68혁명 때 구호가 ‘우리는 사랑할수록 더 많이 혁명한다’였다. 그때 여대생 기숙사에 남학생을 출입금지 시키는 게 굉장한 반감을 일으키면서 시위를 촉발했다고 한다.
김정헌 68전에는 독일 등지에서 젊은이들이 길에서 뽀뽀를 하면 늙은이들이 그냥 쫓아왔다. ‘야,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러고 있어’ 그랬다고 한다. 그런데 68혁명에서 ‘저 꼰대들 밑에서 더 이상 못 살아’ 하면서 뒤집어엎었다. 주로 음악이나 그런 것들로… 우드스탁(음악 페스티벌)이나 이런 데 몇 만 명이 며칠 밤을 모여서 자기들 감성을 고양시킨 거다.
그게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인데, 지난해 촛불집회에 계속 나가보니 그런 느낌이 왔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옆에 있는 사람과 이렇게까지 친절한 느낌을. 이게 에로스 효과다. 그냥 막 껴안아 주고 싶은…(웃음)
(2017년 6월 14일 저녁, 법무법인 지향 사무실에서 좌담회가 진행됐다. ⓒ바꿈)
박석운 6월항쟁을 미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절반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그 정신은 다 계승이 되지만, 사실 6월항쟁이나 87항쟁(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은 그때 다 끝난 거다. 직선제 개헌까지 채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시민들이 군중이 되어서 관철을 시킨 거다.
내 관점에서 절반의 승리밖에 되지 못한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권에서) 이른바 ‘일반 시민’과 노동자 간에 굉장히 입체적인 이간책을 썼다. 여론을 조작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패륜 집단, 집단 이기주의 이런 식으로 몰아갔다. 또, 폭력성을 강조했다. 노동자와 노동운동, 그리고 일반시민들을 이간시키는 수법으로 6월항쟁의 성과가 확산되는 걸 차단한 거다.
두 번째는 대선 과정에서 사회운동, 정치 운동하는 진영에서 전략적인 실수를 했다. 당시에 나왔던 후보 단일화, 비판적 지지론, 독자 후보론… 이게 다 틀린 거였다. '권력 분점을 매개로 한 선거 연합'으로 갔어야 하는데, 당시는 나도 그런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불같이 일어나는 노동운동에 집중을 하느라 대선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민을 못했던 것도 있지만, 시민운동 내지는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고민들이 굉장히 ‘천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정치인들 중심으로 이 문제를 접근함으로써 대사를 그르친 거다.
이와 함께 또 절반의 패배가 만든 것은 결과적으로 노태우, 군인 출신의 대통령의 집권과 3당 야합, DJP연합과 같은 야합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중간에 故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실패를 잉태하게 된 과정이었다고 본다.
절반의 승리로 인해서 그 뒤에 일어났던 일이 노동운동 내지는 민중운동, 부문 운동이 활성화되고 그 뒤에 또 경실련,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운동이 활성화되는 것, 30년간의 여러 사회운동의 기반을 만든 것이다.
(노동자와 일반 시민 간) 이간질 관련해서는 6월항쟁 10주년 때부터, 당시 민교협 의장이자 현재 교육부총리 후보인 김상곤 교수 등과 함께 그런 이야기를 했다. 10주년 토론회에서 같이 이야기를 했던 것이, ‘87항쟁’으로 부르자는 것이었다. 87항쟁의 기본 개념은 6월민주항쟁과 7, 8월 노동자 대투쟁을 합해서 통합적으로 87항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거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대투쟁은 토대의 변화를 일으킨 효과가 있다고 본다.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 노동조합수는 3배, 조합원 수는 2배 정도로 늘어나는 장족의 발전을 했다. 하지만 자본과 권력 쪽에서 집중적인 탄압을 받고, 또 집중적인 투쟁들이 진행되면서 표면적으로는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났다. 하나는, 노동조합 운동이 조금 더 체계화돼서 95년에 가서는 민주노총이 만들어졌다. 한편으로는 그 과정을 통해서 일반 국민, 시민과 노동운동 내지는 노동조합, 조직된 노동자 사이에 문화적 차이, 이간질이 구조화되는 문제가 생겼다. 그런 구조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자폐적 현상도 일부 생기는, 일정 정도 한계도 드러났다.
노동 운동이 여러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성을 지니면서 사회 진보에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다들 주목을 하지 않지만 이번 촛불대항쟁은 조직된 노동자들인 민주노총 대오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6월항쟁과 연이은 노동자대투쟁, 즉 87항쟁을 통해 민주노조 운동이 등장하게 되고, 체계화됐지만 30년이 지난 사이에 새로운 모순,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것들이 등장했다. 과거에는 어용노조 대 민주노조였지만, 지금은 비정규 노동자의 권리찾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가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87년 6월항쟁으로 생긴 정치적 숨 쉴 공간을 뚫고 누적된 노동 모순들이 폭발하면서 노동대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있었다면, 이번 촛불대항쟁의 성과로 생기는 정치적 공간에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가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다. 내 희망까지 담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 역사의 순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김중배 박석운 대표가 말씀하신 노동자와 시민 간의 이간질. 나는 글쎄… 대표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넥타이 부대다. 그들이 노동자다. 이간질 속에도 그런 것(넥타이부대)이 있었다. 하지만 실은 국본을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노동자의 참여를 은근히 배제했다. 조직 속에 넣지 않았다. 그 내면에 백낙청 선생이 말하는 소위 ‘이면 헌법(분단상황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국민 기본권이 제약되는 상황)’이 있을 거다. 색깔론, 반공, 좌빨….
국본의 그때 의식이나 판단을 존중한다면, 그런 것이 이면헌법을 따른 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것(이면헌법)이 개입할 때 운동 자체의 추진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여러 통계를 보면 그때 학생들이 많이 잡혀갔지만, 7, 8월 노동자대투쟁 외에 (좁은 의미의) 6월항쟁 기간 중에 전국에서 체포된 시민을 분류하면 노동자들의 체포율이 높다. 87년항쟁론도 일리가 있지만, 노동자들도 도처에서 참여를 했다. (노동자와 일반 시민이 이간되었다고 하면) ‘넥타이부대’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나.
사회 이때까지의 말씀을 정리하면, 성과와 한계가 어쩔 수 없이 교차되는데 세 가지 측면이 지적됐다. 첫째, 정치적 민주화, 대통령 직선제를 시민의 힘으로 쟁취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한 문제. 둘째, 실질적인 또는 경제적 민주화문제는 6월항쟁에 이어 노동자 대투쟁을 촉발했다는 문제가 있다면, 그 자체가 이반의 현상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또 한가지는 앞서 말한 문화적 측면이다.
사실 근대적 시민 또는 시민 문화의 부재, 껍데기만의 민주주의였는데, 시민항쟁을 통해 근대적 시민 문화가 탄생하고 시민 문화의 징조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 뒤에 그것들이 꽃피지 못하고, 계속 시도되는 상황에서 절반의 또는 미완의 지점들이 보였다는 것이다.
30년은 물리적으로 한 세대라는 의미도 있지만, 현실 속에서 30년을 맞이하는 2017년 다시 시민의 힘으로 동시에 87년체제를 통해 성립된 제도 틀안에서 , 반민주적인 권력을 교체하였다는 의미가 겹치기도 한다. 때문에 아무래도 6월항쟁과 촛불항쟁을 동시에 겪은 세대에서는 이 둘의 연속성이나 연관성을 항상 염두에 두게 되는 것 같다.
▪6월과 촛불항쟁, 그 연속성에 대하여
박영민 시민들이 만들어낸 항쟁이라는 점에서 유관할 수는 있지만, 이번 촛불에 대해서는 그 숫자와 헌정 최초 탄핵이라는 것 외에는 개인적으로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동안 얼마만큼 헌정이 잘 지켜졌던가. 우리가 헌법을 얼마나 준수하는 나라에서 살아왔던가. 파업이 제대로 되지도 못했고, 기본권이 지켜지지도 않았다. 한 번도 헌법 내에서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고 난 후 헌정 질서를 되찾아야 한다고 얘기하니까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다.
나는 오히려 하나만 겪어 봐서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다고 할 수도 있고 한데, 2017년 촛불에 대해 조금 더 까칠하게 보는 것 같다. 내가 경험한 이 역사에서는 아쉬움이 훨씬 더 많다.
(왼쪽부터 전민용 전 회장, 백승헌 변호사, 양길승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이사장, 박영민 활동가 ⓒ바꿈)
전민용 87년에 박종철, 이한열이 있었다면 이번 촛불의 가장 큰 동력은 세월호 참사와 쌓여 있던 사회경제적 모순이라고 본다. 그 희생이 사람들의 감성을 잡아두었다가, 계기를 만나 폭발을 한 것이다.
87년에는 자기 과제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거대한 군사독재 정권의 타도가 시급했고 모두 다 쉽게 공감했다면, 이번에는 다양한 요구가 많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페미니즘. 비정규직 이야기도 나왔고, 여러 차원에서 사회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주인 의식이 확장되고 있는 거다.
또 한편에서는 합리적 보수와 진보가 만났다. 합리적 보수층 역시 ‘이게 나라냐’ 이런 생각을 갖게 됐고, 그들이 같이 모여 광장을 형성한 것이다. 그리고 광장의 뜨거움과 제도의 냉철함이 만나 선출된 살아 있는 권력을 감옥에 보냈다. 이렇게 이중적인 부분들이 모여서 결과를 만들어 냈는데, 세계적으로도 유례없고 새로운 역사를 만든 건 아닐까 생각한다.
김정헌 나는 즐겁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즐거워야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왜 이렇게 즐거울까…).
촛불집회에서, 가장 추운 날이었던 거 같다. 요즘 광화문하고 서촌 일대에 요즘 한복 입고 다니는 여학생들이 많은데, 그러려고 나온지는 모르겠지만 그날도 한복 입은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런데 옷이 너무 추워보였다.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멋진 아주머니 한 분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그 학생들에게 줬다. 백만이나 되는 시민들이 모였으니, 별 사람들이 다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장면들이….
나는 그 촛불집회에서 가장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 그럼 그 아이들이 30년 후까지 기억을 할 것이다. 그때 촛불시위 나도 나갔는데 하고. 자신이 인지가 떨어지더라도 부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30년 후에도 기억을 상기시키고 소환할 수 있다고 본다.
이 혁명이라는 건 완성이 없다.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을 통해서 전파되는, 같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이 이번 촛불은 아주 대단했다. 내가 죽은 다음 30년 후까지 계속될 것 같다. 온 몸으로 느꼈던 감성이 30년 후까지 살아있으리라 생각을 하고, 이번 촛불시민혁명은 감성혁명으로서 그야 말로 90%는 완성된 것이라고 본다.
박석운 광장에 LED 촛불이 많이 있었는데, 초반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이들 손잡고 나온 가족들이 많았는데, 애들이 LED 촛불을 갖고 싶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니까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마구 줬다. 개인적으로 그런 걸 많이 봤다.
또, 어떤 날은 광화문에 비가 좀 왔다. 내가 모자를 쓰니까 조금 오는 비는 견딜 만한데, 비를 맞고 있으니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가방에 있던 우산을 꺼내서 나한테 줬다. 촛불광장 속에서 공동체적 연대, 내지는 공동체가 만들어진 건 분명한 것 같다.
사회 그런 의미에서 다 동의하는 게, 87년 때 완성되지 못한 두세 가지 부분이 이번 촛불에서는 진일보했다는 것 같다.
박석운 87년과 촛불이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부터 이야기하자면, 평화시위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이를 테면 4월혁명 때는 총을 맞고 백 몇 십 명이 죽었다. 광주항쟁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 87항쟁 때는, 사실 평화시위만은 아니었다. 투석하기도 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지 않으면, 우리도 돌 던지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보면 평화시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평화로웠다.
87년보다 이번이 훨씬 평화로운 양상으로 진행이 될 수 있던 이유가 국회가 여소야대였다는 점도 있다. 결정적으로 그 차이가 있었다. 민심이 확인이 되면, 앞서 제도의 냉철함이라고 했는데, 해결할 수 있는 길이 꽉 막힌 것이 아니라 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가 이번 촛불항쟁은 기본적으로 조직된 대오의 투쟁과 미조직 시민들의 합세가 상승작용을 해서 성공한 거다. 언론이나 이런 데서는 그런 걸 착목을 하지 않고, 그저 일반 시민들이 참여했다 어쨌다 하지만 그건 팩트가 아니다. 1~3차 촛불까지는 이른바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주최했다. 3차 촛불집회 때 가서야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1부를 하고, 박근혜퇴진범국민행동이 저녁시간을 맡는 걸로 확산이 됐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학생 등 이른바 조직된 대오들이 투쟁을 키운 거다. 키우는 과정에서 현실에 불만이 있는 미조직 시민들이 대거 가세했지만,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대규모 국민항쟁으로 번진 거다.
말하자면, 87년 당시에는 노동자와 일반 시민들을 이간질해서, 확산이 저들 입장에서는 성공적으로 저지가 됐다. 하지만 이번에서는 거꾸로 조직대오가 주축이 됐고, 여기에 시민들일 가세하면서 이간질을 당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박근혜를 파면시켜 교도소로 보내고, 이재용도 구속시키고, 정권 교체까지 가는 성과를 냈다. 이 부분들이 종전과 달라진 그런 문제다.
물론 항쟁의 승리가 어떻게 ‘촛불항쟁 시즌2’를 통해서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지, 진화‧발전해 갈지가 과제다. 하지만 1차적으로 촛불항쟁은 우리 현대사에서 거의 유일한 성공한 항쟁이다. 1단계 항쟁은 성공은 한 것이다.
사회 6월항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짧지 않았던 기간 진행된 촛불을 유지,강화시키는 가장 큰 동력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제도적으로 보면, 87년체제가 제대로 된 선거를 만드는 데 있어서는 진일보했지만, 선거를 통해서 성립된 정권이라는 이유로 그 정권이 반민주적 행태를 보일 때 제어해내지 못한 측면도 있다. 이번 촛불은 선거 시기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일상 시기에도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로 확장된 측면이 있다.
또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가장 크게 4월의거, 광주항쟁, 6월항쟁 그리고 이번 촛불시민혁명이 큰 획을 그었다고할 것이다.
당시로서는 성과와 한계가 항상 병존하였지만 긴 역사에서 본다면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조금씩 진보해 왔음이 분명하다. 이번 촛불에서 보여준 특징과 성과 중 하나는 반민주적이고 부패한 정권에서 권력을 박탈하는 과정을 제도 내에서 해결했다는 것이다. 또한 다단순시 대의제 안에서만 된 것이 아니라 직접 민주정과 대의제 사이의 결합을 통해서 했다는 점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승리 경험이라 생각이 든다.
이런 성과와 의미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에 느꼈듯이, 이번 촛불항쟁 역시 상당 부분에 있어 여전히 미완이고 새로운 과제를 많이 던져줬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10년 간 어떤 부분에 집중할 것인지 미래 전망 혹은 미래 의지를 다져보았으면 한다.
▪ 촛불 10년, 6월항쟁 40년…앞으로의 과제는
김중배 개헌, 분권, 또 새로운 산업 체계와 시대 변화에 따른 인권 문제 등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은 넘어간다고 할지라도, 정권이 교체됐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를 바탕에서 이끌고 있는 소위 ‘기층 권력’은 전혀 교체되지 않았다.
이것을 문재인 정부에서 다 교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대도 걸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갈 수 있는 토대, 바탕은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유수한 경제학자들이 다 정부에 갔다고 한다. 6월항쟁 30주년 행사 때도 경제 민주화가 아닌, 경제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했다.(웃음)
나는 사전에 준 질문지에 ‘촛불 30년 과제’라고 쓰여 있기에 이렇게 답을 적었다. ‘30년을 또 기다려?’(웃음) 그 뜻은 이 시대적 전환이, 정치경제학적, 사회경제학적 상황과 별개로 시대의 기능이 매우 가속도를 내며 변하고 있다. 나는 대전환기다, 문명적 전환기라고 본다.
다들 알다시피 굉장히 많이 이야기되는, 유행가처럼 다들 4차 산업혁명 노래를 부른다. AI(인공지능)을 비롯한 시스템이 들어오면서, 다음 세대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떤 직업이 없어지는가. 하지만 나 같은 아마추어가 보기에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게… 농업혁명 때 부족사회가 생기고, 시장이 생기고, 국가의 맹아가 생기고 (그 다음에) 산업국가가 생기고 근대 국가가 생겼다.
4산업혁명이 대격변인데, 여기에 맞는 시스템, 기술적 격변에 대응하는 사회시스템에 대한 구상이 전혀 없다. 그래야 산업혁명이 되는 건데…. 2차 산업혁명 때 대량 생산을 하다 보니까 근대 국가가 생기고 노동자 계급이 생기고 했는데, (지금은) 구체적인 구상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가야 하느냐.
그런데 시간이 별로 없다. 그것들을 일거에 다할 수는 없지만, 토대를 쌓아가야 되지 않나. 그래서 앞서 에로스효과를 의도적으로 꺼냈다. 왜냐. 나는 이번 촛불집회에서 제일 많이 따라다닌 곳이 중‧고등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이 중학생들이 ‘중학생 혁명당’ 이름을 딱 내걸었더라. 아, 얘들이 무슨 생각일까.
어떤 사람들은 그런다. 혁명이라는 것은 성취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내가 나서는 게 혁명이라고. 나서는 내가 혁명이다. 그 아이들에게 왜 더 관심을 가졌냐면, 지금 말씀드린 시스템과도 관계가 있다. 우리는 87년 체제를 말하지만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에 신자유주의의 본궤도가 깔렸다. 20년이 흘러서 세계적으로 회자되고, 우리도 그걸 느끼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인간형들이 팽배했다. 우리 주위에도 쫙 있다. 각자도생, 승자독식, 착취, 억압 같은… 그래서 인간들이 모래알 같이 됐다. 중학생들도 학원가기 바쁘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틀에 넣고 쥐어짜는 이 와중에, 저 애들이 어떻게 해서 혁명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나는 다음 세대에 더 희망을 갖는다.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 쪼아대도 생명은 원천부터 사랑의 맹아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광장에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 아니겠나. 부모가 가라고 했겠나? 선생이 가라고 했겠나?
소위 일부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뉴-노말(New Normal)을 바탕으로, 예를 들어 박근혜가 정상이라고 말한 것들이 노말이었다. 독식하고 착취하고 하는 게 노말이었다. 박근혜만 전복된 것이 아니라, 신자유적인 문명이 비정상을 새로운 노말이라고 규정하는 이런 상태였는데, 그걸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가.
백낙청 선생이 ‘이면 헌법론’이라는 걸 말했다. 종북 좌파, 색깔론, 반공주의 같은 것들이 이면 헌법이다. 6월항쟁 때는 어버이연합도 없었는데, 박사모 집회에 가니까 판플렛을 나눠준다. 멸공진리교. 이게 이면 헌법이다. 뉴-노말로써 내면화된 소위 ‘내면 헌법’이 있지 않은가. 정부가 어떻게 하고, 정책을 어떻게 하더라도 내면 헌법이 증발되거나 승화해서 중학생혁명당처럼 에로스로 바뀔 수는 없을까.(웃음)
(전민용 전 회장(왼쪽)과 백승헌 변호사 ⓒ바꿈)
김정헌 나는 지금 녹색당이다. 권력의 독과점부터… 특히 우리나라의 양당 제도에 의해서 끊임없이 여야로 편이 갈라져서 있는데, 이게 고쳐지면 조금 나은 삶이…. 예술가로서도 정말 세상이 좋아졌다고 느낄 수 있어야 그림이 되는데 이게 항상 뭔가 찌뿌둥한, 그런 느낌이다.
자신의 가치로 소수가 모였지만, 그것이 하나의 정당이나 대의활동을 할 수 있어야 기본적인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 텐데, 그걸 아직도 만들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 정권이 바뀌기는 했는데, 개헌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선거 제도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양당 제도에서의 권력 독과점 현상을 해소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촛불혁명을 계기로 그런 부분까지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촛불혁명을 만들어 준 최순실과 정유라를 잊지 말아야 한다.(웃음)
박석운 누적된 민심 이반 상황에서 자멸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멸의 가장 적나라한 징후가 헌재에서 8:0으로 탄핵이 인용됐을 때, 박근혜 일당은 5(기각):3이나 4:4라고 예상했다는 것 아닌가. 계속 헛발질하면서 자멸을 한 측면이 있었다. 두 번째는 여소야대를 만들어내면서 제도적 해결의 가능성의 틈이 보였다는 점, 거기에 조직된 대오와 미조직 시민들이 합체를 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당장 눈앞에는 당면한 청산해야할 것이 많이 있다. 검찰 등 권력기관의 개혁이 첫째고, 둘째는 언론 개혁이다.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다른 모든 개혁을 만드는 개혁, 기본적 개혁으로서 중요하다. 그런데 검찰개혁은 될 것 같지만 언론개혁은 잘 안 보인다. 그래서 굉장히 걱정이다. 현재 갑갑한 국면이 벌어지는 주요한 배경이, 언론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것에서 기인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본다.
그 외에도 정치개혁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른바 연동형 비례대표제, 득표수와 의석수가 비례하게 만드는 것인데 일반 선거법 개정으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한다. 개헌을 통해서만이 가능할 것이라 본다. 저들은 권력 구조 개헌을 중심으로 내각제니 이원집정부제니 요구하지만, 우리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안 하면 개헌은 없다. 이렇게 정리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외에 결선투표제, 18세 투표권 등도 정치개혁의 문제다.
그 다음 문제가 이른바 노동개혁과 민생개혁이 있다. 노동기본권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것, 최저임금부터 시작해서 교원과 공무원의 노동조합 활동 보장,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금지 등 노동 개혁이 확실하게 되어야 한다. 민생 개혁은 최저임금 문제, 밥쌀 수입 중단, 철거 시 용역 폭력 문제도 있다. 그리고 재벌 개혁과 세월호 문제나 원자력발전소 같은 안전 사회 문제… 이런 것들이 당면 개혁에 속한다.
향후 10년, 20년을 이야기한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진보 정치. 지금 문재인 정부의 개혁이 굉장히 위태롭다. 원인은 진보정치가 헤매고 있어서다. 문재인 정부의 교섭단체에 문재인정부보다 모두 우파들만 있다. (가만 두면 문재인 정부는 오른쪽으로) 끌려갈 일만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개혁하게 하려면, 진보정치가 역할을 제대로, 대오를 갖추고 해야 한다. 어떤 경로로, 어떤 수단으로, 어떤 목표를 갈 지에 대해 감이 잘 안 잡히는, 실감이 안 나는…굉장히 괴로운 (상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피해갈 수가 없다. 이게 되어야 우리 사회가 제대로, 개혁이 되지 않겠나 싶다. 또 하나는 분단 모순이다. 분단 적폐 청산인데, 평화와 자주 통일.
그렇게 진보 정치와 평화 자주 통일, 이 두 부분이 중기적으로 중요한 과제가 된다고 본다.
전민용 일단 헌법에 직접 민주주의 요소들이 들어가면 좋겠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세계사적인 문제들, 예를 들어 4차 산업혁명, 기후 변화, 또 지역적‧국지적으로 벌어지는 갈등들에 대해서도 우리나라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대안을 가져야 한다.
대안적 사고를 하려면 새로운 가치와 방향에 대한 훨씬 더 유연한 생각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진보정치도 좁은 틀에서 현재 우리가 진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뿐만이 아니라, 2030 세대가 생각하는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들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깊어지고,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박영민 다른 이야기를 하지면, ‘민주주의’에서 민의 개념은 항상 달랐다고 생각한다. 범위가 확장되고, 깊이가 달라질 때도 있었다. ‘민’의 개념은 중립적이지 않고 항상 정치적인 맥락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10년 후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가치가 발견돼서, ‘이것도 민주주의에 포함된다고?’ 하며 놀랄 수 있을 거다. 예를 들어, 30년 전에 동물권이 나올 거라고 누가 상상을 했겠나. 그런 식으로 아직 발견되지 못한 가치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10년 후에는 더 많은, 더 넓은 ‘민’들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조금 더 다양한, 시각을 넓히려는 노력을 이 사회 전체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김중배 이미 뉴질랜드에서는 강에 인격을 부여했다. 히말라야 빙하도 그렇다. 자연에 대해서 존중하는, 인간과 동일시하는 걸 녹색당 같은 곳이 해야 한다. 반대로 지금부터는 ‘적색당’이 될 수 있는데, AI 시스템이 들어왔을 때 로봇에 과세를 해야 한다. 원천적으로 AI 로봇을 소유할 수 있는 건 막대한 자산가 밖에 없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니까 소요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가치’라는 말에 여러 가지가 들어 있다. 이것들이 곧 온다.
사회 어떤 도전이 끝나면 비로소 새로운 도전을 알게 된다. 촛불 역시 우리가 해결할 많은 숙제를 남겨주었다. 말씀해주신 여러 과제들을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논의할 시기가 지금이 아닌가 한다.
산업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한국 사회가 패스트 팔로워(fast fallower)가지고는 안 된다. 새로운 자기 가치를 창출해 내야 하지 않겠냐고 한다. 한국 민주주의도 그 수준에 이른 게 아닌가. 우리가 발전해서라기보다는, 그런 과제가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긴 시간 귀한 말씀하여주셔서 감사하다. 모두 건강하셔서 10년 후, 또 30년 후 촛불과 6월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 나누길 소망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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